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리아 여왕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rincess_Victoria_and_Dash_by_George_Hayter.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uchess_of_Kent_and_Victoria_by_Henry_Bone.jpg|width=100%]]}}}|| ||<:>어린 시절의 빅토리아 여왕.||<:>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와 함께.[* 어린 빅토리아의 손에 들린 그림은 1820년 1월 23일에 작고한 부친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에드워드 왕자]]의 초상화이다.]||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의 딸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빅토리아 공녀]] 사이에서 1819년 [[5월 24일]]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즉위 배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막 태어났을 무렵엔 [[조지 3세]]의 살아있는 유일한 손녀로서 언젠가는 왕위를 계승할 추정상속인으로 여겨졌다. 아버지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가 죽은 뒤 잠시 추정상속인이 될 가능성이 낮아졌지만 [[윌리엄 4세]]가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아델라이드 왕비]] 사이에서 1819년에 낳은 첫딸 샬럿, 1819년에 사산된 아이 1명, 1820년생 셋째 엘리자베스, 1822년 넷째로 사산된 쌍둥이 왕자가 차례로 요절하면서 다시 추정상속인으로 지위가 부상한다. 본래 [[독일]] 출신인 데다 남편마저 잃은 뒤 궁정에서 경원시당하며 영국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친정에 돌아가고자 했던 여왕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켄트 공작부인]]은 장차 딸이 즉위하면 [[섭정]]이 될 야심을 품고 비서인 [[https://en.wikipedia.org/wiki/John_Conroy|존 콘로이]]와 함께 어린 빅토리아를 옥죄기 시작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콘로이의 딸 [[https://en.wikipedia.org/wiki/Victoire_Conroy?wprov=sfla1|빅투아르 콘로이]]를 빅토리아의 소꿉친구로 붙여주고,[* 빅투아르 콘로이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이 없다. 빅투아르는 나름대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상냥하게 대했으나, 빅토리아 여왕은 신분도 낮고 무엇보다 존 콘로이의 딸인 그녀를 싫어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콘로이는 자기 딸을 엄연한 왕녀였던 빅토리아 여왕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 혹시라도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해서 죽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이유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빅토리아 혼자서는 못 하게 할 정도였다. 딸의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써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음악]], [[역사]],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시켰음은 물론이다. 또한 자신들 이외의 다른 영국 왕족들이 빅토리아와 친하게 지내는 걸 막으려고 [[윌리엄 4세]]와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아델라이드 왕비]]가 빅토리아와 만나는 것도 방해했다. 비록 딸이 아닌 조카였지만 빅토리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아델라이드 왕비는 그녀와 만나기 어렵게 되자 매우 슬퍼했고 윌리엄 4세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가 그들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어린 조카딸을 괴롭힌다고 생각해 저 둘을 혐오했다. 그는 1836년 자신의 생일 만찬 때, 켄트 공작부인의 면전에 대놓고 '짐은 빅토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서 그대가 [[섭정]]이 되는 꼴은 결코 보지 않게 할 것'이라 일갈했다. 발언 전문은 다음과 같다. > ''''하느님이 짐을 최소한 9개월은 더 살게 해줄 거라 믿소...내 그렇게 되면 지금 내 옆자리의, 저 악마 같은 조언자에게 둘러싸여 상황도 제대로 제어 못해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이나 하는 내 무능한 제수씨가 내 조카의 왕위를 가지고 노는 일 없이, 잠정 왕위 계승자인 저기 앉아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오.'''' > > 'I trust to Go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nine months longer ... I should then have the satisfaction of leaving the exercise of the Royal authority to the personal authority of that young lady, heiress presumptive to the Crown, and not in the hands of a person now near me, who is surrounded by evil advisers and is herself incompetent to act with propriety in the situation in which she would be placed.' 당시 빅토리아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고,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켄트 공작부인]]은 당연히 [[피꺼솟|붉으락푸르락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빅토리아가 18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되고 나서''' 26일 후에 윌리엄 4세가 세상을 떠난 것. 빅토리아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를 극성스런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어머니]]와 그 비서의 등쌀에 시달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지 못 한 채 억눌려서 자랐다. 어린 빅토리아가 의지했던 유일한 인물은 가정교사 루이즈 레첸 여남작이었는데, 그녀는 콘로이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켄트 공작부인]]의 섭정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다. 여남작은 빅토리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해 (특히 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 경에게) 강하고 타협하지 않는 여성이 되도록 가르쳤다. 이런 유년기를 보낸 빅토리아는 자기 주장이 매우 확고한 고집스런 성격으로 자랐다. 이런 성격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았고 여왕과의 금슬이 좋았던 남편 [[앨버트 공]]마저 그녀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 했다. 그저 비위를 맞춰가며 달랬을 뿐. 당대에도 앨버트 공이 [[보살]]급 멘탈이라 저 성격 받아주고 산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루이즈 레첸 여남작(Baroness Louise Lehzen)은 빅토리아의 즉위 후에도 여왕의 개인 비서와 조언자로 일하다가 앨버트 공과 빅토리아의 결혼 이후 첫 아이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난 1840년 겨울에 앨버트 공과의 갈등 끝에 은퇴해서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다. 레첸 여남작은 1870년 사망할 때까지 빅토리아와 평생 편지를 교환하며 친분을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